한가위 아침, 노인인권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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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6-10-12 00:00 조회 1,957회 댓글 0건본문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향을 찾는 도시의 직장인,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맞이하는 연로한 부모. 무척 낯익은 풍경이다. 해마다 명절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방송에 비치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낯익은 장면에서 한발자국만 뒤로 물러서면 모든 게 낯설어진다.
당장 명절에 찾아온 자식에게 화사한 미소를 짓던 노인들이 명절이 아닌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그리고 누구나 결국 맞게 될 노년의 삶을 그렇게 지내도록 방치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지에 대해 물어보자. 많은 경우 대답이 궁색해진다.
최근 노인인권에 대해 고민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점점 심각해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령화 문제를 다루는 언론과 사회의 시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가 주로 연금 고갈, 노동력 부족, 복지 비용 증대 등 고령화의 경제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왔기 때문이다. 노인 인권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이런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는 삶의 조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늙어간다는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안(童顔)에 열광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늙은 얼굴과 몸은 과연 감추고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인가. 장애인, 여성,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조건에 대해 주목해 왔던 인권단체들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노인들이 처한 문제에 대해서는 왜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인권오름〉 최근호는 노인 인권에 대해 고민해 온 류은숙 씨의 글을 소개했다. 이 글에서 류 씨는 이제 인권단체들이 노인 인권 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고령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선진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의 사회가 겪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령화에서 비롯된 선진국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가난한 나라들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이 허물어지고 있는 세계적 추세도 한몫했다. 이런 경향 속에서 노인들의 삶은 점점 척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류 씨는 고령과 노화(老化)가 치료의 대상이라거나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조건이라는 시각을 거부했다. 이어서 류 씨는 노인들이 단지 생계만을 위한 경제활동을 넘어서는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적절한 돌봄(Care)을 제공받을 권리를 인권의 한 영역으로 보장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멀리 떨어져 지내 온 가족들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는 한가위 아침, 노인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수하는 류 씨의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음은 〈인권오름〉 최근호에 실린 류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내가 사는 곳 골목 모퉁이 평상에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두커니 앉아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대문 앞에 박스를 깔고 쪼그려 앉아 계시는 할머니도 자주 보게 된다. 종이상자를 힘겹게 주워 모으는 허리 굽은 노인들은 거리의 흔한 풍경이다.
노인에 대한 배려는 치매 보장 보험으로?
고령화 시대는 분명 우리 시대의 화두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만 주로 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종종 접하게 되는 성년의 사람들은 한두 분의 어른에게 용돈을 드리면 되지만, 더 어린 세대는 여섯 분(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에게 용돈을 드려야 한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는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꼭 이런 경제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령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동안 동안(童顔)이 인터넷 검색엔진의 인기 검색어로 떠오른 적이 있다. 동안에 대한 이런 동경과 열망의 배경에 나이먹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놓여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족회의를 당당하게 소집하고 경제력과 집안의 대소사에 막강한 발언력을 가진 노인들은 연속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브라운관에 비친 그들 역시 노인학대나 소외 등을 비롯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물론 사회면 뉴스를 접할 때면 가끔 무슨무슨 궐기대회에서 노인들이 단골 출연진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노인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자리를 가득 메우며 들어선 것은 치매까지 다 보장한다는 내용의 사보험 광고들이다. 노인을 위한 우리 사회의 배려는 기껏 노년을 위해 최소한 몇 억을 준비해야 한다는 재무설계 조언이 전부다.
이제 노인인권을 이야기할 때
그렇다면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이들에게 눈을 돌려 보자. 인권단체들은 그간 장애인, 여성, 아동 등과 같은 집단의 인권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 하지만 노인의 인권에 대한 논의는 이제 갓 발동이 걸린 상태다. 시야를 나라 밖으로 돌린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현재 노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 집단과 달리 포괄적인 국제조약도 없고 전문기구도 없는 상태다. 최근 일련의 국제회의를 통해 논의된 노인의 인권 관련 원칙들이 있을 뿐이다.
국제 사회는 지구적 차원에서 고령화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모였다. 1982년 비엔나 회의와 2002년 마드리드 회의가 그것이다. 비엔나 회의가 선진국의 고령화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마드리드 회의는 고령화가 단지 선진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인식 위에서 진행됐다.
선진국들은 사회보장정책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경제정책을 급격히 늘어난 노인 인구에 맞춰 조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고, 사회보장제도가 없거나 부족한 많은 국가들은 젊은이들이 선진국으로 대거 이주한 상태에서 노인의 주요 부양원인 가족의 전통적 역할이 약화된 상황이 겹치면서 노인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현실 진단이다.
비엔나 회의는 노인에 관한 최초의 국제문서라 할 고령화에 관한 비엔나 행동계획을 채택했고, 마드리드 회의는 고령화에 대한 정치선언과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두 회의 사이에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것이 노인을 위한 유엔원칙이다. 이 원칙이 고령화와 노인 인권에 관한 논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원칙은 총 18개 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것은 다시 독립, 참여, 돌봄, 자아실현, 존엄이라는 5개 범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원칙 속의 항목들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노인의 사회 참여는 단지 생계만을 위한 게 아니다
고령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삶을 뜻하는 게 아니다. 또 치료의 대상도 아니다. 사회 속에서의 삶이 지속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그렇게 되려면 노인이 독립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소득과 교육 등에 대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 노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일부 언론은 단지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난 높은 생산성이라는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한다. 물론 노인의 지속적 고용과 그로 인한 사회통합은 경제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인의 사회 참여는 생계를 위한 노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영위, 각종 자원 활동, 지역사회 참여 등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노인 자신을 위한 사회운동과 단체의 형성 및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인권운동 진영이 주목해야 할 대목도 이 부분이다.
돌봄(Care)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그것은 노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고령화 대책은 모든 노인을 포함해야 한다. 즉 상당히 몸이 약해서 돌봄이 반드시 필요한 노인들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령화 정책이 초고령층을 배제하고, 상대적으로 젊고 활동적인 노인에게 초점을 맞출 위험이 있다. 또한 육아, 가사, 돌봄과 관련된 여성의 노동이 생애 전반에 걸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 노인에 대해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노인인권 보장은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로 향하는 첫 걸음
이런 원칙에 기반하여 국제사회가 내세운 목표는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The Society For All Ages)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에 걸쳐 나이 드는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고령화에 대한 고민은 우리 모두의 미래에 관한 것이지 노인 인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자세로 전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가 시급하다.
결국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응은 모든 연령과 세대를 위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노약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하고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 △노인의 의사와 선택의 존중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가족의 부담에만 떠맡기지 않는 것 △고용‧교육‧여가‧조직 등에 대한 노인의 지속적인 참여 등이 필수적인 요소로 지적돼 왔다.
하지만 이런 원칙들이 구호로만 다가올 뿐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단지 고령화의 진행 속도를 재며 계산기 두드리기에도 바쁜 상황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노인의 인권을 경제·사회적 논의 속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원칙들을 실제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 속에서 구체화시켜나가는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제대로 성년이 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당장 명절에 찾아온 자식에게 화사한 미소를 짓던 노인들이 명절이 아닌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그리고 누구나 결국 맞게 될 노년의 삶을 그렇게 지내도록 방치하는 게 과연 온당한 일인지에 대해 물어보자. 많은 경우 대답이 궁색해진다.
최근 노인인권에 대해 고민할 때가 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점점 심각해지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고령화 문제를 다루는 언론과 사회의 시각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제까지의 논의가 주로 연금 고갈, 노동력 부족, 복지 비용 증대 등 고령화의 경제적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왔기 때문이다. 노인 인권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은 이런 경제적 문제를 넘어서는 삶의 조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늙어간다는 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동안(童顔)에 열광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 늙은 얼굴과 몸은 과연 감추고 부끄러워해야 할 대상인가. 장애인, 여성, 성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조건에 대해 주목해 왔던 인권단체들이 또 다른 사회적 약자인 노인들이 처한 문제에 대해서는 왜 적극적인 발언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던질 때가 됐다는 것이다.
〈인권오름〉 최근호는 노인 인권에 대해 고민해 온 류은숙 씨의 글을 소개했다. 이 글에서 류 씨는 이제 인권단체들이 노인 인권 문제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고령화가 심각하게 진행된 선진국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대부분의 사회가 겪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령화에서 비롯된 선진국의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젊은이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가난한 나라들 역시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전통적인 형태의 가족이 허물어지고 있는 세계적 추세도 한몫했다. 이런 경향 속에서 노인들의 삶은 점점 척박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 류 씨는 고령과 노화(老化)가 치료의 대상이라거나 사회에서 격리돼야 할 조건이라는 시각을 거부했다. 이어서 류 씨는 노인들이 단지 생계만을 위한 경제활동을 넘어서는 다양한 사회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런 여건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노인들이 적절한 돌봄(Care)을 제공받을 권리를 인권의 한 영역으로 보장하는 게 필수적이라고 지적했다.
멀리 떨어져 지내 온 가족들이 한데 모여 차례를 지내는 한가위 아침, 노인인권에 대한 각성을 촉수하는 류 씨의 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다음은 〈인권오름〉 최근호에 실린 류 씨의 글 전문이다. 〈편집자〉
내가 사는 곳 골목 모퉁이 평상에는 아침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우두커니 앉아 하루를 보내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버스를 타고 지나다 보면 대문 앞에 박스를 깔고 쪼그려 앉아 계시는 할머니도 자주 보게 된다. 종이상자를 힘겹게 주워 모으는 허리 굽은 노인들은 거리의 흔한 풍경이다.
노인에 대한 배려는 치매 보장 보험으로?
고령화 시대는 분명 우리 시대의 화두다. 그런데 이 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만 주로 조명되고 있는 듯하다. 최근 종종 접하게 되는 성년의 사람들은 한두 분의 어른에게 용돈을 드리면 되지만, 더 어린 세대는 여섯 분(부모, 조부모, 증조부모)에게 용돈을 드려야 한다는 내용의 언론 보도는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꼭 이런 경제적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령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한동안 동안(童顔)이 인터넷 검색엔진의 인기 검색어로 떠오른 적이 있다. 동안에 대한 이런 동경과 열망의 배경에 나이먹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인식이 놓여 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가족회의를 당당하게 소집하고 경제력과 집안의 대소사에 막강한 발언력을 가진 노인들은 연속극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브라운관에 비친 그들 역시 노인학대나 소외 등을 비롯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물론 사회면 뉴스를 접할 때면 가끔 무슨무슨 궐기대회에서 노인들이 단골 출연진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노인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사회가 노인을 어떻게 돌봐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사라진 자리를 가득 메우며 들어선 것은 치매까지 다 보장한다는 내용의 사보험 광고들이다. 노인을 위한 우리 사회의 배려는 기껏 노년을 위해 최소한 몇 억을 준비해야 한다는 재무설계 조언이 전부다.
이제 노인인권을 이야기할 때
그렇다면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이들에게 눈을 돌려 보자. 인권단체들은 그간 장애인, 여성, 아동 등과 같은 집단의 인권문제에 대해 집중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 하지만 노인의 인권에 대한 논의는 이제 갓 발동이 걸린 상태다. 시야를 나라 밖으로 돌린다 해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현재 노인의 권리에 관해서는 타 집단과 달리 포괄적인 국제조약도 없고 전문기구도 없는 상태다. 최근 일련의 국제회의를 통해 논의된 노인의 인권 관련 원칙들이 있을 뿐이다.
국제 사회는 지구적 차원에서 고령화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모였다. 1982년 비엔나 회의와 2002년 마드리드 회의가 그것이다. 비엔나 회의가 선진국의 고령화 문제를 주로 다뤘다면 마드리드 회의는 고령화가 단지 선진국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인식 위에서 진행됐다.
선진국들은 사회보장정책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경제정책을 급격히 늘어난 노인 인구에 맞춰 조정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해 있고, 사회보장제도가 없거나 부족한 많은 국가들은 젊은이들이 선진국으로 대거 이주한 상태에서 노인의 주요 부양원인 가족의 전통적 역할이 약화된 상황이 겹치면서 노인들의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것이 국제 사회의 현실 진단이다.
비엔나 회의는 노인에 관한 최초의 국제문서라 할 고령화에 관한 비엔나 행동계획을 채택했고, 마드리드 회의는 고령화에 대한 정치선언과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 두 회의 사이에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것이 노인을 위한 유엔원칙이다. 이 원칙이 고령화와 노인 인권에 관한 논의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이 원칙은 총 18개 항으로 구성돼 있으며 그것은 다시 독립, 참여, 돌봄, 자아실현, 존엄이라는 5개 범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원칙 속의 항목들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노인의 사회 참여는 단지 생계만을 위한 게 아니다
고령은 사회로부터 분리된 삶을 뜻하는 게 아니다. 또 치료의 대상도 아니다. 사회 속에서의 삶이 지속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또 그렇게 되려면 노인이 독립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소득과 교육 등에 대한 접근이 보장돼야 한다. 노인의 사회참여에 대해 일부 언론은 단지 풍부한 경험에서 우러난 높은 생산성이라는 경제적 차원에서만 접근한다. 물론 노인의 지속적 고용과 그로 인한 사회통합은 경제적 차원에서도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노인의 사회 참여는 생계를 위한 노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영위, 각종 자원 활동, 지역사회 참여 등을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노인 자신을 위한 사회운동과 단체의 형성 및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인권운동 진영이 주목해야 할 대목도 이 부분이다.
돌봄(Care)을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다. 그리고 그것은 노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따라서 고령화 대책은 모든 노인을 포함해야 한다. 즉 상당히 몸이 약해서 돌봄이 반드시 필요한 노인들을 포함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령화 정책이 초고령층을 배제하고, 상대적으로 젊고 활동적인 노인에게 초점을 맞출 위험이 있다. 또한 육아, 가사, 돌봄과 관련된 여성의 노동이 생애 전반에 걸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성 노인에 대해 특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노인인권 보장은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로 향하는 첫 걸음
이런 원칙에 기반하여 국제사회가 내세운 목표는 모든 연령을 위한 사회(The Society For All Ages)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생에 걸쳐 나이 드는 과정을 겪는다. 따라서 고령화에 대한 고민은 우리 모두의 미래에 관한 것이지 노인 인구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모두가 당사자라는 자세로 전 세대의 문제로 바라보는 태도가 시급하다.
결국 고령화 사회에 대한 대응은 모든 연령과 세대를 위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노약자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이동하고 일상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 △노인의 의사와 선택의 존중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돌봄이 필요한 노인을 가족의 부담에만 떠맡기지 않는 것 △고용‧교육‧여가‧조직 등에 대한 노인의 지속적인 참여 등이 필수적인 요소로 지적돼 왔다.
하지만 이런 원칙들이 구호로만 다가올 뿐 현실감을 느낄 수 없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단지 고령화의 진행 속도를 재며 계산기 두드리기에도 바쁜 상황이니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노인의 인권을 경제·사회적 논의 속에 포함시키는 것 자체가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원칙들을 실제 삶에서 제기되는 문제 속에서 구체화시켜나가는 과제가 남아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과제를 풀어가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제대로 성년이 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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