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영감, 나 인자 똑똑한 할머니요” 어머니들 삶 떠오르는 글에 ‘뭉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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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0-04 10:09 조회 665회 댓글 0건본문
입력 : 2023.09.29 18:58
뒤늦게 한글 배운 전남 어르신들의 ‘시’
전남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출품된 할머니들의 시 <밥>과 <왜냐하면>.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제공.
“내 입으로 들어가는 밥이 아니라/ 남의 입으로 들어가는 밥을 지으면서/ 나는 ‘밥’이 밥인 줄도 몰랐다. (중략) ‘밥’ 자가 꼭 밥 같다/ 내 배에 밥이 들어가니 배부르다.”
전남 나주 중부노인복지관에서 한글을 배운 나재숙 할머니(66)가 쓴 <밥>이라는 시다. 식당을 오랫동안 운영한 할머니는 평생 손님들을 위해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었다. ‘내 입’ 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사람들 배 부르라’고 지어 온 밥이다.
뒤늦게 한글을 배운 할머니는 평생 처음 자신을 위한 ‘한글 밥’을 지으셨다. “‘ㅂ’ 받침 글자 배우다 밥을 써보니 ‘밥’자가 꼭 밥 같다.” 할머니가 쓴 <밥>은 올해 전라남도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서 ‘글아름상’을 받았다.
전남지역 성인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운 주민들이 직접 쓴 글이 감동을 주고 있다. 29일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자료를 보면, 전남에서 ‘성인문해교육’ 잠재 수요자는 28만58523명에 이른다.
문해교실 학생 대부분은 50대 이상으로,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많다. 시화전에 전시된 작품을 읽다 보면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고향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떠오른다.
최고상인 ‘글꿈상’은 전남도교육청 목포도서관 지혜반에서 한글을 배운 송덕화 할머니(83)의 <왜냐하면>이 수상했다.
“왜냐하면을 배웠다/ 이유나 까닭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아침밥을 먹고나서 신통의원 가서 치료 받았다/ 약국에 가서 약을 타가지고 왔다/ 왜냐하면 안아프고 싶어서이다.”
송 할머니는 ‘왜냐하면’의 뜻을 제대로 이해했다. “안아프고 싶어” 힘겹게 병원과 약국을 들르신 할머니가 건강해지셨으면 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전남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출품된 할머니들의 시 <무꺼불까>와 <나도 인자 바뻐>.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제공.
‘공부하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르는 할머니도 있다. 올해로 만 88세가 된 안감례 할머니(곡성군 석곡면 월봉리)는 한글 교실에서 시간이 너무 빨리 가는 것이 아쉬워 시간을 ‘무꺼볼까(묶어볼까)’ 생각했다.
“시간이 히딱 가부러/ 쪼개 공부항거 가튼디 어디로 가부러/ 따듬떠듬 익꼬 딱꼬 쓰다보이/ 시간니 가부러// 꽁꽁 무꺼부까.”
너무 빨리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기 위해 할머니는 공부하는 시간을 ‘묶을’ 생각을 했다. 맞춤법이 틀려도 다 읽고 느낄 수 있다.
정순희 할머니(70)는 못 배운 것을 타박했던 남편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누가 알았겄소>라는 시에 담았다. 남편은 “느그 어매는 낫 놓고 ㄱ자로 모른께. 셈도 할줄 모른께”라며 면박을 줬다.
늦깎이로 수년째 배움의 길로 들어선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넘어 지금은 중학생이 되었다고 한다. “어려운 글자 받침까지 손쉽게 척척/ 곱셈 나눗셈을 넘어 분수까지/ 별자리를 알고 오대양 육대주”를 배웠다.
할머니는 배운 것을 가지고 남편에게 복수한다. “당신은 이 내용을 아시오, 물음에/ 꿀먹은 벙어리된 서방/ 이런 날이 올줄 누가 알았겄소”.
전남 성인문해교육 시화전에 출품된 할머니들의 시 <영감>과 <누가 알았겄소>. 전남인재평생교육진흥원 제공.
보성 벌교도서관에서 한글을 배운 이금례 할머니(84)도 ‘영감’에 대한 서운함이 있다. “영감한테/ 글 좀 가르쳐 달라고 하니까/ 안 갈쳐주고 세상을 떠나부렀다// 아이고 인자 다 필요없소/ 내가 학교가서 공부 배와서/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고”.
할머니는 먼저 세상을 뜬 ‘영감’을 그리워 하며 말한다. “나 인자 똑똑한 할머니요”.
김봉임 할머니(84)는 공부를 하고 나서 ‘엄청 바빠졌다’고 한다. 아침부터 보던 TV도 재미가 없어졌다. ‘젊은이만 하는 줄 알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아들한테 편지도 쓴다. “엄마 걱정 말고 너 건강 챙겨라”.
잠이 안 와 뒤척이던 밤, 할머니는 일기장을 꺼냈다. “비가 오니 상추가 웃고 있어요/ 오늘은 기분도 좋은깨 민들레도 하나 그려 넣는다/ 나도 인자 바쁘다 바뻐”. 시인이 따로 없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할머니가 쓴 <돈 찾은 날> 이라는 시에는 ‘배우지 못해 서러웠던’ 세월에 눈물이 난다.
“은행 가서 돈 찾고 싶다/ 자식 카드 말고 내 통장으로/ 내 손으로 돈찾고 싶다/ 문해공부 다니고/ 돈 찾아 나온날 눈물이 막 나왔다/ 행복했다. 신기했다”.
지난 21일 전남 무안군 전남도청사 1층에서 전남성인문해교육 시화전이 열리고 있다. 강현석 기자.
이들 할머니들을 비롯해 44명은 지난 22일 열린 ‘2023년 전라남도 문해 한마당’에서 각종 상을 받았다. 광양시 문해교실에서 한글을 배우신 왕궁자 할머니(83)가 말했다.
“우리 나이에 글자 모르는 거 다 똑같아서 창피하지 않고 즐겁게 공부했습니다. 모두 와서 함께 배우고 재미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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