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50년 전 칠레의 '9.11' 사건, 이 영화가 던진 화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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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9-22 11:43 조회 643회 댓글 0건본문
23.09.21 17:54최종업데이트23.09.21 18:33
아우구스토 공고라 & 파울리나 우르티아, 이 부부는 각자 자국 칠레 내에서 저명한 언론인과 유명 배우 경력의 소유자다. 아우구스토는 사회참여에 힘 쏟는 비판적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저서와 함께 당대의 지식인 반열에 오른 존재다. 파울리나는 배우로 활동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아 문화부 장관에 해당하는 공직도 훌륭하게 소화할 정도로 부부 둘 다 유명인사다. 17년이라는 오랜 세월 연애를 거쳐 노후에 이르러서야 결혼에 골인한 이들 부부의 관계는 질투심이 생길 정도로 돈독하고, 지성이 철철 넘쳐흐르는 둘만의 대화는 듣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지적이다.
이들은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어 보이는 행복한 노년처럼 보인다. 사회적 존경과 아주 부유하진 않을지언정 당장 의식주 걱정은 안 해도 될 법한 주변 환경이 영화 초반부터 확인된다. 책과 그림으로 가득 채워지고 작은 안뜰 정원이 있는 집에서 부부는 소소한 사회적 활동 참여와 함께 훌륭하게 장성한 자녀들을 접견하며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숨길 수 없는 비밀이 있다. 영화는 뜸 들이지 않고 그들이 직면한 위기에 대해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남편인 아우구스토 공고라에게 알츠하이머 증세가 시작된다. 총명의 화신처럼 보이던 남편이 점점 기억을 잃어가며 아이처럼 퇴행하는 모습을 아내인 파울리나는 지켜봐야 한다. 소외와 불안에 시달리는 남편을 파울리나는 헌신적으로 돌본다. 애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파울리나는 참을성 있게 과거의 모습을 잃어가는 남편을 격려하고 챙긴다. 이쯤만 되더라도 영화를 보다 눈시울을 붉히는 이들이 여럿 나올 상황이다. 사회생활 워낙 잘해서인지 주변 지인들도 모두 한마음으로 파울리나를 도와 아우구스토의 상태를 악화되지 않도록 조력한다.
하지만 기대수명 백세시대에 생물학적 수명은 늘지만 여전히 해답이 요원한 사회적/의학적 쟁점이 숱하게 대두되는 현실을 영화는 제대로 반영한다. 이들의 모든 노력이 절절하게 조명되지만 끝내 아우구스토가 직면한 문제에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다만 조금이라도 치매 증상이 서서히 진행되길 기대할 뿐이다. 그런 주위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토의 증상은 악화를 피할 수 없다. 총명하던 지식인은 자신이 세상과 소외되어 간다는 공포에 점점 빠져든다. 여기에 세상을 휩쓴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격리가 아우구스토의 불안을 한층 증폭시킨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의 퇴행을 잊어야 하는데 누굴 만나러 다닐 수도 없는 것이다. 비록 새소리 아름답고 근사한 집에서 인생의 벗인 아내의 돌봄으로 안전하지만 아우구스토는 자신을 잃어가며 혼자만의 감옥에 유배당한 격이다.
영화는 이런 일상 묘사를 통해 현대사회의 예상 기대수명이 늘어나지만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는 노후의 삶 문제와 대책을 자연스레 환기시킨다. 더불어 전 지구적 재앙이었던 코로나19로 인한 관계의 단절이 치매 악화에 큰 영향을 준 것 또한 시의성이 높다. 의학 전문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영화가 담아낸 부부의 비극적 운명은 시사교재로 활용될 만한 유용성과 함께 비슷한 고민을 품에 안은 채 점점 나이 들어가는 이들에겐 진한 색깔로 다가설 테다.
'칠레 전투'의 기억을 소환하는 이 영화의 사회적 기억투쟁
▲ 영화 <이터널 메모리>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남아메리카의 영화강국 칠레가 오랜만에 작심하고 선보인 대도시 중산층 버전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같은 노부부의 애틋한 순애보로 짐작할 법하다. 하지만 본 작품에는 한국사회 변화를 꿈꾸며 과거 군사독재정권에 맞섰던 이들이라면 전혀 낯설지 않을 굵직한 별개의 중심축이 숨겨져 있다. 그 공적/사회적 영역과 노부부의 사적 영역이 교차하면서 상승호환작용을 극대화하는 게 이 영화의 독창적이고 비범한 힘이다.
영화는 두 개의 기억 축을 종횡으로 연결시킨다. 세상 누구라도 인생의 정리단계를 상상하면서 공감 가능한 두 주인공의 황혼 시간대와 느닷없이 그들에게 닥쳐온 시련에 대해 누구나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법하다. 그만큼 현대사회와 작금의 인류문명이 당면한 근본적인 노인문제 위기를 잘 풀어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번째 기억 축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를 각성시키고자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온 인간 저항군 리더가 끄집어낸 유명한 화두, '빨간 약'과 '파란 약'의 자유의지로의 선택과 연결된다. 즉 거대한 사회악에 대해 개인이 눈감을 것이냐 맞서 저항할 것이냐에 대한 (심지어 생사의 기로에 설 것을 각오한) 결단에서 가시밭길을 선택한 이들의 과거와 현재가 영화 속 '기억'의 다른 축으로 등장한다.
그 또 다른 하나의 기억 선은 바로 이들 부부가 함께 의지해가며 수없이 많은 위기를 헤쳐 온 칠레의 현대사다. 우리에게 칠레는 그저 질 좋고 저렴한 와인을 공급해 주는 태평양 반대편의 익숙하지 않은 나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나라의 역사는 한국 현대사와 겹쳐져 보이는 지점이 적지 않다. 바로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강한 영향력과 함께 그 후원을 받은 군부의 정치적 개입 역사다. 그 현대사의 비극은 칠레를 넘어, 남아메리카 전체의 정치지형은 물론 20세기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1970년, 세계 최초로 국민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민주사회주의자'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아옌데는 폭력혁명을 배격했지만 칠레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모순을 혁파하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잇달아 펼친다. 물론 그의 정책은 대선 당시부터 공약해 온 것들이다. 즉 칠레 국민 다수결의 민주적 동의를 얻은 정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칠레를 장악하고 있던 기득권 세력들에게 아옌데의 개혁은 조상 대대로 그들이 누려온 이권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용서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여기에 외세가 개입한다. 게다가 자원 부국이자 남아메리카 정치의 핵심 국가인 칠레, 즉 미국의 안마당인 아메리카 대륙에서 쿠바에 뒤이은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 군부와 정보기관의 암묵적 개입이 회자되었다. (칠레는 세계적인 구리 생산국으로 우리 집 전선 코일 속에도 칠레 구리가 들어 있을 테다.) 피노체트가 외국 대기업에게 이윤이 독점되던 구리 광산을 국영화해 예산을 확보하려 진행하자 국내외 대기업과 기득권의 불만이 폭발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CIA의 개입설이 파다한 칠레 군부 쿠데타가 발발한다. 하지만 이 시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연작 <칠레 전투> 3부작에서 언급되듯 급작스런 친미군부의 쿠데타 이전부터 칠레 내 기득권들의 공공연한 도전이 아옌데 정부 집권 직후부터 발생했다. (<칠레 전투> 3부작의 첫 번째 편 부제는 '부르주아지의 봉기'이다.) 대기업이 관제 파업을 주도하고 제도권 언론이 황색 뉴스를 살포한다. 운수회사는 대중교통을 차단하는 등 사회혼란을 부추긴다. 그러나 민주적으로 당선된 정부를 지지하는 광범위한 시민들의 힘을 목격한 기득권은 끝내 최후 수단으로 무력을 선택한다. 합법적인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군인들이 전투기로 대통령 궁을 폭격하는 진짜 '항명'과 '하극상'을 일으킨 것이다. 1973년, 집권 3년 차에 일어난 일이다.
불의에 항거하며 맺어진 사랑과 투쟁이 황혼에도 이어지다
세계적인 영화 거장,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은 2001년 9.11 사태에 대해 자신을 포함한 거장 감독들에게 의뢰된 어떤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감독 각자가 자유롭게 선택해 9.11에 대한 짧은 단편을 제작하고 이를 옴니버스 형태로 공개하는 것이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감독들이 자신들의 시선으로 9.11을 해석해 화제가 되었지만 그중에도 단연 가장 거대한 논란을 가져온 게 켄 로치였다. 켄 로치는 누구나 예상했던 전제를 창의적으로 전복해 버린다. 그는 2001년 9.11이 아니라 1973년 9.11을 다룬 것이다.
켄 로치의 10분 전후 단편에서 9.11은 미국과 서방세계가 테러와의 전쟁을 외치며 세계무역센터의 비극을 어떻게 더 짙게 각인시킬까 하는 고민을 근본적으로 넘어선다. 반대로 미국이 '과거를 묻지 마세요'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고 있던 칠레 군부 쿠데타를 정면으로 소환해 살바도르 아옌데가 대통령궁에서 쿠데타 세력의 망명 권유를 거부하고 최후까지 항거하다 살해된 1973년의 기억을 소환해 버린 것이다. 단편의 결말에선 미국이 제공한 전투기로 칠레 군부가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자료화면이 떡 하니 등장한다. 한방 맞은 기분이었을 테다.
미국이 3세계 곳곳에서 자행한 오만과 죄악이 돌고 돌아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했다는 것, 결국 무고한 인민들의 피가 흐르는 악순환의 운명이라는 것, 세상을 뒤덮는 증오와 복수의 어둠은 과거로부터 물려온 업보이기에 그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제안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피해에만 광분하던 당시 미국은 켄 로치의 제안에 화답은커녕, 그 후 몇 년간 미국에 발도 붙이지 못하게 규제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물론 역사는 켄 로치의 통찰이 옳았음을 증명했지만 말이다.
켄 로치의 단편영화 속에서는 1973년 9.11이라는 시간이 각인되지만 <이터널 메모리> 영화 속 주인공들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 이제 겨우 시작된 것뿐이었다. 전두환을 너무나 닮았던 (실제로 서로 무척 비교되기도 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살바도르 아옌데 민주정부의 전복으로 끝날 리 없었다. 자신들의 이권을 위협하는 민주세력의 힘을 목격한 쿠데타 세력은 공공연하게 저항하려는 이들을 '말살'하고자 했다. 마치 우리의 1980년 5월 항쟁과 삼청교육대처럼 군부독재는 수많은 이들을 살해했다. 수많은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실종되고 고문당했다. 국외로 운 좋게 망명할 수 있었던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의문사가 횡행하고 끔찍한 괴담이 훗날 사실로 대거 드러나기도 했다. 정치범을 헬리콥터에 태워 태평양 한복판에서 꽁꽁 묶은 채 바다에 던졌다는 것이다. 전국 곳곳에 강제수용소가 세워지고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런 시절에 그들은 만났고 함께 투쟁에 나섰다. 영화 중반에 아우구스토가 과거 기억을 (필사적으로) 회상하며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자신의 절친한 친구를 떠올리는 장면처럼, 당시 칠레 민주화 투쟁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고 해야만 했던 일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드러난 것처럼 유독 연애기간이 길었던 것이다. 당장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그들이 처음 만난 것도 소개팅이 아니라 투쟁과정에서 동료의 형태였으니 사적 연인 이전에 둘은 정치적/공적 '동지'였던 셈이다. 영화 속 둘의 단란하지만 뼈 있는 대화는 그런 오랜 인연과 출발점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한 당대 지식인들의 기억투쟁 기록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탄압받은 희생자 유가족들은 '보랏빛 수건'을 두른 채 군부독재의 경고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저항에 나선다. 그런 시련 끝에 국내외 비판에 직면한 독재정권 대신 민주화가 시작된다. 지난한 투쟁 끝에 서슬 퍼런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점진적 민주화 단계에 접어들긴 했지만 한계는 뚜렷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4.19처럼 독재자가 쫓겨나거나 1987년처럼 사실상 항복 선언을 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혁명적' 상황에 도달한 사례는 현대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다.) 스페인과 유사하게 칠레는 대립하던 좌/우파 사이에 정치적 타협을 통한 해결을 모색한다. 민주화 세력이 온전한 사회적 권력관계의 전복을 이루는 데 도달하지 못했기에 프랑코 이후의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주요 정치세력 간 고도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침묵 협약'을 체결해야 했다.
침묵 협약은 직접적으로 고문이나 살인에 참여한 혐의가 입증되는 정도가 아니라면 형사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졌다는 신호다. 즉 정치적 책임은 면제되기에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면 면책을 인정받는 식이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칠레의 과거청산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었다. 잔챙이 몇몇만 단죄받고 정작 학살의 최고 수괴인 피노체트를 포함해 대부분은 편히 침대에서 죽을 수 있었던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들에겐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학살 원흉과 부역자들이 저리 멀쩡하게 활보할 수 있다니 말이다.
아우구스토는 과거 어두운 역사에 대한 기억과 조명이 미래를 위해 발목을 잡는 게 아니라 필수적으로 전제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데 이후 여생을 바쳐왔다. 자신이 직접 겪은 수난과 성찰을 기반으로 대표작 <금지된 기억>을 출판했고, 이 책은 미래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억투쟁이 왜 중요한가를 논증하는 주요한 사료이자 필독서로 남았다. 그리고 그가 필생의 반려자가 될 파울리나에게 청혼 가까운 내용으로 책머리에 잔뜩 메모를 담아 헌정되기도 한다. 둘의 공적/사적 영역은 그렇게 분리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던 것이다.
그런 이중의 '기억' 개념을 펼쳐 보이는 영화는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을 오가면서 비판적 지식인이 굳세게 지켜온 기억을 잃어갈 때 처하는 딜레마를 조명하고 현대사회가 당면한 노인복지 문제로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또한 기억투쟁을 통해 역사 바로 세우기에 도전해 온 아우구스토가 실존적으로 직면한 고난을 통해 현재 칠레 민주주의의 상황과 단계에 대해 은유한다. 양파껍질 마냥 영화 속 내용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관객의 지적 호기심을 끌어올린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순애보'의 공공성
그럼에도 결국 영화의 중심축은 부부의 '사랑'이다. 보편적으로 세계 어디서나 공명할 수 있는 기억과 정체성, 그리고 위기에 직면할 때 빛나는 순애보에 대한 이야기로 완성도가 빼어난 귀결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중요한 논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주제를 설득력 있게 묘사하니 눈에 쏙 들어오는 게 당연한 이야기다. 다큐멘터리이지만 편집과 연출력이 빼어난 점이 곳곳에서 확인되는데, 예를 들자면 도입부에서 화면에 각인되는 영화의 제목이나 마지막에 참여한 이들을 소개하는 크레디트 글자 디자인 역시 영화의 주제와 연동되는 이미지 디자인으로 꾸려진다. 검은 화면에 선명하게 새겨진 텍스트 정보들은 어느 틈엔가 마치 바람에 쓸려 사라지는 먼지처럼 희미해져 간다. 상실과 망각에 필사의 저항을 위한 '기억의 운동' 과정과 어우러지는 조응인 셈이다.
어떤 이들은 굳이 정치적 역사를 환기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화면 가득히 펼쳐지는 노부부의 순애보와 함께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대처할지 상념에 빠져들 테다. 부부가 함께 오랜만에 동반 영화 관람을 하고 난다면 참 서로 나눌 이야기 많을 법한 작품이다. 아울러 노인복지정책 관계자들이라면 그저 취약계층 대책을 넘어서 전 사회적인 대책을 수립해야 할 정책 고민에 빠져들 만하다. 그렇게 영화는 솜씨 있게 고령화 사회에 맞춤 이야기를 풀어낸다.
하지만 그들의 지난한 삶과 신념에 눈길이 가기 시작한다면 칠레 현대사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좀 더 본격적으로 주목이 갈 테다. 찾아보면 국내에도 과거 칠레의 어두운 역사와 현재도 여전히 진행 중인 사회민주화 과정에 대해 유의미한 자료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으니 복습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좋은 영화는 영화관 문을 나서는 순간 질문이 시작되고 감흥이 오래 기억되게 마련이라는데 <이터널 메모리>는 목소리 높여 자기 입장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스며들 듯 세상에 대한 관심과 자신에 대한 성찰을 연결시킨다. 이렇게 만들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올해 세상을 떠난 아우구스토 공고라를 추모하며, 개봉을 맞이한 본 작품이 근래 한국사회에 허깨비처럼 횡행하는 부적절한 역사 논쟁에 대한 유의미한 카운터가 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극단적 진영논리와 함께 어느새 시민의 사회참여가 냉소와 조롱에 당면한 작금의 한국사회에서 유용한 질문을 이 영화를 통해 얻게 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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