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쉼터 이야기> 치매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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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6-01 11:13 조회 507회 댓글 0건본문
- 입력 2023.06.01 11:00
유현숙 『엄마의 방』연재
공부와 건강 챙겼지만
내성적 성격과 집생활
결국 치매 걸린 엄마
혈관성 치매 5% 진행
가족 관심과 관찰 필요
치매! 엄마에게 치매가 찾아오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도 상상 못한 치매와 마주 했을 때 내 가족들은 말문이 막혔다. 친가도 외가도 조상 중에 치매를 앓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치매 환자를 본 적이 없다.
엄마도 건강을 지키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몸이 아프면 자식에게 짐이 된다면서. 그래서 노인대학을 10년 넘게 다니며 영어, 수학, 한자, 서예를 연마하고 동아리 활동까지 열심히 했다.
또 육체적 건강을 위해 요가 등록을 하고는 빠진 날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걷기보다는 달리기를 했다. 또 독거노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나는 농담 아닌 농담처럼 대학에 진학해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해보시라고 했다.
엄마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좋아했다. 어느 날인가는 내게 시 쓰기를 가르쳐달라고 졸라서 시 쓰기와 수필 쓰기를 가르쳤다. 엄마를 가르치면서 노인들을 위한 글쓰기 강의로 재능기부를 하려고 기관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다들 일 벌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 그들은 국가의 녹을 받으면서 정작 일은 안 하려 하는지 화가 났다.
그 당시 나는 주부들을 위한 글쓰기를 도서관에서 10여 년 넘게 무료로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얼마나 많은 노인분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할까 싶었다.
하지만 자서전 쓰기나 수필 쓰기를 해보겠다는 내 계획은 무시되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지자체 선거라도 나가야하나?’ 생각도 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는 관심이 없고 선거 때만 되면 노인들 모이는 곳에 나가서 표를 구걸하는 인간들이 역겨웠기 때문이다.
지금 치매 환자 300만 명 시대가 왔고, 누구나 치매 환자도 되고, 노인이 될 것이다. 이 나라에는 노인 인구가 넘쳐 날 것이다. 실버주택이나 요양원을 돈으로 생각해 복지 재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맡겨둘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복지 공화국》이라는 책도 냈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강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게으르다. 청소나 설거지도 심지어는 집안일도 엄마나 도우미에게 맡기고 살았다. 부지런하고 마음먹으면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미숙아였다. 그래서 몸이 부실한 딸을 위해 내 아들을 엄마가 키워주었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만 할 수 있도록 강아지까지 보살폈다.
엄마는 일곱 살 때 외할머니는 여의고 누구에게 투정도 못 부리며 자랐고, 결혼해서는 호된 시집살이까지 했다. 아버지는 노처녀인 나를 시집보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쫓기듯 결혼한 내게 동생과 엄마를 남겨두고 예순도 안 돼 일찍 세상을 뜨셨다. 그렇게 남겨진 남동생 셋을 엄마와 내가 공부시켰다. 엄마는 공부 잘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기자 생활과 병행하며 밤새워 글을 쓰는 내 직업을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작가인 딸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사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다. 조용히 교사 생활이나 하길 바랐는데 글을 쓰겠다는 딸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엄마는 워낙 내성적이어서 모든 걸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큰 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었다. 친구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성격도 조용해서 사람들과 할 일 없이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혼자 책을 읽거나 노인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복습하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 시찰은 하루에 세 번 이상 꼭 왔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어제까지 술술 풀었던 방정식이 안 풀린다며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수학 선생으로 나서야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제 풀었던 문제를 자꾸 잊어버린 것이 연세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침 맞고 어느 때는 두통약을 드시고 괜찮아졌다. 지금 와서 자책하는 것은 내 일 바쁘다고 엄마를 더 자세히 관찰하지 못해 엄마의 치매를 조금이라도 키웠다는 점이다.
사실 그 당시 엄마는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동창들을 만나러 다녔고, 모여서 여행도 다녀왔다. 누가 봐도 정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 아프고 깜빡깜빡하던 것이 이미 혈관성치매의 시작이었지 않나 싶다. 내가 엄마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신경 썼더라면 하고 후회한다. 두통이 자주 온다면 나는 병원으로 먼저 달려갈 생각이다.
치매는 가족들의 관심으로 치료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 요즘은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하는 우리 엄마 같은 분들이 많다. 따로 살지만 매일 만나며 살더라도 나이 들면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문제는 가족들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
치료제도 없고 단지 진행을 좀 더 늦출 수 있는 정도의 약이 있다. 그러나 약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암보다 무서운 것이 치매이다. 암은 수술도 하고 약도 있고 본인만 괴롭지만 치매는 대책이 없다.
겨울의 새벽을 뚫고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잠시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따님 집 호수도 생각 안 난다고 하시고, 이사 간 줄 모르시는지 303호 번호키가 안 열린대요.”
내가 경비실로 찾아갔을 땐 엄마는 핑크색 밍크 극세사 잠옷에 보라색 패딩 조끼만 입고 떨고 계셨다. 이미 예견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의 옷차림을 보자 온몸이 떨렸다.
엄마를 모시고 들어와 따뜻한 차를 만들어드리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켰다. 그런 다음 욕조에 거품을 풀어 긴장을 풀어드렸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은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동생들이 놀랄까 봐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무섭고 두려웠다. 당시 내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이었고, 남편도 사업상 베트남에 있어 집에는 강아지와 나뿐이었다.
그나마 큰동생이 가까이 살고 있어 아침 일찍 달려왔다. 그리고 바로 이대 목동병원에 가서 뇌 사진을 촬영한 결과 혈관성치매가 5% 진행된 상태였다. 짐작은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멈췄다. 엄마는 나보다 더 건강했고, 건강하게 수명을 다하실 줄 알았다.
“엄마 약 챙기기도 그렇고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요?”
“싫어. 내 집 두고 왜 내가 너랑 살아?”
엄마는 혼자 살기를 고집했다. 엄마는 오직 큰아들밖에 몰랐지만 항상 내가 곁에 있어야 했다. 내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또한 항상 대학병원 가까이 살아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전원주택으로 가려고 했을 때도 엄마 말씀은 절대 안 가시겠다고 했다.
“내가 아프면 네가 운전해 데려가지만, 심장수술까지 한 네가 아프면 난 운전 못하는데 어쩔 거야?”
그래서 그만두었다. 집 가까운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윤 교수님이 엄마에게는 엄마 건강을 보살펴줄 최고의 의사고 자식보다 더 좋은 분이었다. 몸이 조금만 안 좋으면 바로 달려가고, 너무 자주 가서 윤 교수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다. 엄마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만큼이나 윤 교수님을 믿고 의지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께 항상 고마워했고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윤 교수님은 워낙 온화하신 분이라 걱정 말라고 했다. 엄마가 우리들과 나누지 못하는 고민도 교수님과 나누셨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교수님이 다른 곳으로 멀리 가게 되자 엄마는 한동안 나라를 잃은 것처럼 실망했다. 아마도 윤 교수님이 계속 계셨다면 치매도 안 왔을 것이고, 왔더라도 더 빨리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엄마를 보면서 나이 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오래 지켜봐줄 의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난 행복하다. 30년 가까이 내 건강을 살펴준 여러 분야의 의사가 있으므로.
치매의 조기 발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도 치매 판정을 받으면 환자가 스스로 약을 제때 잘 챙겨먹을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엄마를 모시면서 후회했던 것도 이 문제다. 어떤 약은 아침약을 두 번 먹거나 저녁약을 안 먹어 아침약과 저녁약 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날짜를 적어두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노인들은 절대 충격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잘나가던 동생들의 사업이 부도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동생들과 돈 문제가 얽혀 있는 나와 동생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내 편을 들면서 엄마의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갔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많아도 너무 많은 주변 인물들을 정리해버렸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상담도 해줘야 하고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생기므로 생활을 단순화하는 중이다. 나는 엄마와 같은 치매는 절대 피하고 싶다.
치매는 지병과도 관련 있겠지만 스트레스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명인사들의 치매 사례를 살펴봐도 육체 관리는 잘했지만 치매로 고생하다 가신 분들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관리와 운동, 정신건강을 잘 관리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나에게는 절대 치매 같은 건 찾아오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여성경제신문(https://www.womaneconomy.co.kr)
엄마도 건강을 지키려고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몸이 아프면 자식에게 짐이 된다면서. 그래서 노인대학을 10년 넘게 다니며 영어, 수학, 한자, 서예를 연마하고 동아리 활동까지 열심히 했다.
또 육체적 건강을 위해 요가 등록을 하고는 빠진 날이 없었다. 아침저녁으로 걷기보다는 달리기를 했다. 또 독거노인을 위한 봉사활동도 열심히 했다. 나는 농담 아닌 농담처럼 대학에 진학해서 사회복지학 공부를 해보시라고 했다.
엄마는 항상 새로운 도전을 좋아했다. 어느 날인가는 내게 시 쓰기를 가르쳐달라고 졸라서 시 쓰기와 수필 쓰기를 가르쳤다. 엄마를 가르치면서 노인들을 위한 글쓰기 강의로 재능기부를 하려고 기관들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다들 일 벌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왜 그들은 국가의 녹을 받으면서 정작 일은 안 하려 하는지 화가 났다.
그 당시 나는 주부들을 위한 글쓰기를 도서관에서 10여 년 넘게 무료로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 엄마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얼마나 많은 노인분들이 글을 쓰고 싶어 할까 싶었다.
하지만 자서전 쓰기나 수필 쓰기를 해보겠다는 내 계획은 무시되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지자체 선거라도 나가야하나?’ 생각도 했다. 노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는 관심이 없고 선거 때만 되면 노인들 모이는 곳에 나가서 표를 구걸하는 인간들이 역겨웠기 때문이다.
지금 치매 환자 300만 명 시대가 왔고, 누구나 치매 환자도 되고, 노인이 될 것이다. 이 나라에는 노인 인구가 넘쳐 날 것이다. 실버주택이나 요양원을 돈으로 생각해 복지 재벌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맡겨둘까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 《복지 공화국》이라는 책도 냈다.
나는 우리 엄마처럼 강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게으르다. 청소나 설거지도 심지어는 집안일도 엄마나 도우미에게 맡기고 살았다. 부지런하고 마음먹으면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미숙아였다. 그래서 몸이 부실한 딸을 위해 내 아들을 엄마가 키워주었고,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만 할 수 있도록 강아지까지 보살폈다.
엄마는 일곱 살 때 외할머니는 여의고 누구에게 투정도 못 부리며 자랐고, 결혼해서는 호된 시집살이까지 했다. 아버지는 노처녀인 나를 시집보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쫓기듯 결혼한 내게 동생과 엄마를 남겨두고 예순도 안 돼 일찍 세상을 뜨셨다. 그렇게 남겨진 남동생 셋을 엄마와 내가 공부시켰다. 엄마는 공부 잘하고 유학까지 다녀온 자식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리고 기자 생활과 병행하며 밤새워 글을 쓰는 내 직업을 싫어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지 작가인 딸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다. 사실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상식에도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다. 조용히 교사 생활이나 하길 바랐는데 글을 쓰겠다는 딸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엄마는 워낙 내성적이어서 모든 걸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큰 소리 한번 내는 법이 없었다. 친구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성격도 조용해서 사람들과 할 일 없이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혼자 책을 읽거나 노인대학에서 배운 것들을 복습하며 지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집 시찰은 하루에 세 번 이상 꼭 왔다.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지 어제까지 술술 풀었던 방정식이 안 풀린다며 설명해달라고 했다. 나는 수학 선생으로 나서야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어제 풀었던 문제를 자꾸 잊어버린 것이 연세 때문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또 가끔 머리가 아프다고 해서 침 맞고 어느 때는 두통약을 드시고 괜찮아졌다. 지금 와서 자책하는 것은 내 일 바쁘다고 엄마를 더 자세히 관찰하지 못해 엄마의 치매를 조금이라도 키웠다는 점이다.
사실 그 당시 엄마는 지하철을 몇 번 갈아타면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동창들을 만나러 다녔고, 모여서 여행도 다녀왔다. 누가 봐도 정상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머리 아프고 깜빡깜빡하던 것이 이미 혈관성치매의 시작이었지 않나 싶다. 내가 엄마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신경 썼더라면 하고 후회한다. 두통이 자주 온다면 나는 병원으로 먼저 달려갈 생각이다.
치매는 가족들의 관심으로 치료시기를 앞당길 수 있다. 요즘은 가족과 함께 살지 않고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하는 우리 엄마 같은 분들이 많다. 따로 살지만 매일 만나며 살더라도 나이 들면 치매 검사를 받아야 한다. 이런 문제는 가족들의 관심이 있어야 한다.
치료제도 없고 단지 진행을 좀 더 늦출 수 있는 정도의 약이 있다. 그러나 약만으로는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암보다 무서운 것이 치매이다. 암은 수술도 하고 약도 있고 본인만 괴롭지만 치매는 대책이 없다.
겨울의 새벽을 뚫고 경비실에서 인터폰이 왔다.
“잠시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따님 집 호수도 생각 안 난다고 하시고, 이사 간 줄 모르시는지 303호 번호키가 안 열린대요.”
내가 경비실로 찾아갔을 땐 엄마는 핑크색 밍크 극세사 잠옷에 보라색 패딩 조끼만 입고 떨고 계셨다. 이미 예견했지만 엘리베이터 안에서 엄마의 옷차림을 보자 온몸이 떨렸다.
엄마를 모시고 들어와 따뜻한 차를 만들어드리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시켰다. 그런 다음 욕조에 거품을 풀어 긴장을 풀어드렸다. 그러는 동안 내 머릿속은 폭탄을 맞은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동생들이 놀랄까 봐 아침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무섭고 두려웠다. 당시 내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 중이었고, 남편도 사업상 베트남에 있어 집에는 강아지와 나뿐이었다.
그나마 큰동생이 가까이 살고 있어 아침 일찍 달려왔다. 그리고 바로 이대 목동병원에 가서 뇌 사진을 촬영한 결과 혈관성치매가 5% 진행된 상태였다. 짐작은 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멈췄다. 엄마는 나보다 더 건강했고, 건강하게 수명을 다하실 줄 알았다.
“엄마 약 챙기기도 그렇고 나랑 같이 사는 거 어때요?”
“싫어. 내 집 두고 왜 내가 너랑 살아?”
엄마는 혼자 살기를 고집했다. 엄마는 오직 큰아들밖에 몰랐지만 항상 내가 곁에 있어야 했다. 내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었다. 또한 항상 대학병원 가까이 살아야한다는 생각이었다. 엄마를 모시고 전원주택으로 가려고 했을 때도 엄마 말씀은 절대 안 가시겠다고 했다.
“내가 아프면 네가 운전해 데려가지만, 심장수술까지 한 네가 아프면 난 운전 못하는데 어쩔 거야?”
그래서 그만두었다. 집 가까운 대학병원 가정의학과 윤 교수님이 엄마에게는 엄마 건강을 보살펴줄 최고의 의사고 자식보다 더 좋은 분이었다. 몸이 조금만 안 좋으면 바로 달려가고, 너무 자주 가서 윤 교수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다. 엄마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만큼이나 윤 교수님을 믿고 의지했다.
우리 가족은 그분께 항상 고마워했고 찾아가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윤 교수님은 워낙 온화하신 분이라 걱정 말라고 했다. 엄마가 우리들과 나누지 못하는 고민도 교수님과 나누셨다는 걸 알게 됐다.
그런데 교수님이 다른 곳으로 멀리 가게 되자 엄마는 한동안 나라를 잃은 것처럼 실망했다. 아마도 윤 교수님이 계속 계셨다면 치매도 안 왔을 것이고, 왔더라도 더 빨리 발견하지 않았을까? 그런 부질없는 생각도 했다.
엄마를 보면서 나이 들면 나를 가장 잘 알고 오래 지켜봐줄 의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면에서 난 행복하다. 30년 가까이 내 건강을 살펴준 여러 분야의 의사가 있으므로.
치매의 조기 발견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도 치매 판정을 받으면 환자가 스스로 약을 제때 잘 챙겨먹을 것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내가 엄마를 모시면서 후회했던 것도 이 문제다. 어떤 약은 아침약을 두 번 먹거나 저녁약을 안 먹어 아침약과 저녁약 통을 만들었다. 그리고 날짜를 적어두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노인들은 절대 충격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엄마는 잘나가던 동생들의 사업이 부도나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동생들과 돈 문제가 얽혀 있는 나와 동생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고, 내 편을 들면서 엄마의 스트레스는 점점 커져갔다.
그래서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많아도 너무 많은 주변 인물들을 정리해버렸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상담도 해줘야 하고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생기므로 생활을 단순화하는 중이다. 나는 엄마와 같은 치매는 절대 피하고 싶다.
치매는 지병과도 관련 있겠지만 스트레스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저명인사들의 치매 사례를 살펴봐도 육체 관리는 잘했지만 치매로 고생하다 가신 분들이 많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관리와 운동, 정신건강을 잘 관리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나에게는 절대 치매 같은 건 찾아오지 않는다고, 그 누구도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여성경제신문(https://www.womaneconom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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